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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41]경인로 (京仁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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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41]경인로 (京仁路)
  • 김윤영기자
  • 승인 2007.01.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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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인천항 잇는 유일한 육상교통로

구로구 온수동 산17번지(온수동 시계)에서 영등포구 영등포동1가 94번지(영등포 로터리)에서 이르는 가로(街路)로 길이 9㎞, 너비 35m의 왕복8차선 도로 경인로.

영등포구의 영등포동·도림동·문래동, 구로구의 신도림동·구로동·고척동·개봉동·오류동·온수동·항동을 통과하는 도로로 일반국도 제46호선인 경인국도에서 도로명을 인용하였는데, 이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도로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름 속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도로로 매 시대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다.

1899년 경일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경인로는 수도 서울과 어촌 인천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육상교통로였다. 그렇지만 인천이 항구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은데다 한강 주운(舟運, 배로 짐 따위를 나르는 일)이 화물수송의 동맥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번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1876년 일본과 수호조규가 맺어지고 1883년 인천이 무역항으로서 외국에 개방됨으로써 경인로의 중요성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1881년 경인간에 거마(車馬, 수레와 말)가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 이 도로를 수축(修築,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했지만 폭이 2미터 정도에 노면은 요철이 심해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한강주운을 이용하지 않는 한 서울과 인천을 잇는 유일한 교통로는 경인로 뿐이었기에 보행자, 승마자, 교여(轎輿, 가마와 수례), 짐꾼들로 경인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인로 중간에 위치한 오류동은 사람과 화물이 숨을 돌리고 가는 중간 기착지로서 주막거리라 불리며 번성했다. 안양천 하류의 한경변이 위치한 구로지역의 중요한 선착장이던 양화진 역시 경인간을 왕래하는 사람과 물자로 붐볐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893년 경인로에서 마차를 운행, 인천에 있던 청국 무역상 동순태를 통하여 청국 관영회사 ‘초상국’으로부터 차관(借款, 한 나라의 정부나 기업, 은행 따위가 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옴)을 도입했는데 그 중 일부로써 청국제 승객마차 40량, 짐마차 60량을 구입했다. 객차는 승객 2명과 심부름꾼 1명을 태우고 경인간을 6시간에 주파했다고 한다.

경인철도 개통 이후부터는 경인로가 빛을 보지 못했지만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준공되자 경인로의 중요성은 높아졌다. 경인로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과 최대 무역항인 인천을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에는 서울과 영등포 사이의 도로는 폭이 30미터로 확장되고 노면도 아스팔트로 포장됐으며 이후 자동차 운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요성을 더해갔다. 1923년 10월부터 서울-양평 사이에 자동차가 매일 운행되었고 1928년 서울-인천 사이의 자동차가 매일 12회 왕복운행했다고 한다.

193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과 국토분단으로 산업시설과 자동차가 파괴되어 교통의 수요와 역할이 감소됐으나 임진강 유역의 통행이 막혀 한강주운이 두절되자 경인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1966년 11월 26일 영등포 구청에서 경인로라 명명하였으며 경인로는 경인철도와 더불어 한국의 심장부인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로서 경인지방뿐만 아니라 한국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간접자본이다.

그리고 지금도 구로의 발전을 위해 경인로는 바쁘게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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